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키 다케오 (문단 편집) === 유년 및 성장기 === [[도쿠시마현]]에서 농업 겸 비료생산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. 1920년 도쿠시마 상업학교로 진학하여 4학년 재학 중, [[야구]]부 [[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|고시엔]] 출전비용을 마련하고자 바자회를 개최해 성공을 거두었다. 그러나 학교에서 이 수익을 야구부가 아닌 학교 전체를 위한 예산으로 전용하자, 미키는 학교 측에 예산사용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였다. 학교가 이를 거부하자 미키는 격분하여 동급생들을 이끌고 수업 거부 투쟁을 주도하며 학교와 마찰을 일으킨 끝에 [[강제전학|강전]] 처분을 당하여 [[고베시|고베]]에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. 이 사건은 미키의 인생에서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. 그는 [[메이지대학]] 전문부 상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법학부에 편입해서 1937년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 [[웅변]]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. 졸업 후 잠시 [[USC]]로 유학을 떠났으나 중도귀국하였고, 그 해 바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다. 그의 결혼은 미키가 고베에서 다니던 학교의 이사장, 간사이 상계의 거물 유우키 도요타로[* 야스다 은행(現 [[미즈호 은행]])의 부행장으로 후에 [[일본은행]] 총재, 척식(拓務)대신, 대장(大藏)대신 (現 [[일본 재무성|재무대신]])을 역임했다.]의 중매로 이루어지게 된다. 유우키는 미키를 높이 평가하여 미키가 중의원 의원을 지내던 1940년, 모리 노부테루[* 모리 재벌 창업자이자 중의원 의원. 그가 세운 쇼와전공이라는 회사는 훗날 [[https://ko.m.wikipedia.org/wiki/%EC%87%BC%EC%99%80%EC%A0%84%EA%B3%B5_%EC%82%AC%EA%B1%B4|쇼와 전공 사건]]을 일으켜 [[아시다 히토시|아시다]] 내각을 붕괴시켰다.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당시 대장성의 핵심 보직인 주계국장에 앉아있던 [[후쿠다 다케오]] 전 총리도 있다. 10만엔을 수뢰하여 수사를 받았다.]라는 '''재벌의 딸을 아내로 얻을 수 있도록''' 중매를 서주었다. 가난한 도쿠시마의 농가 출신에 미래가 불안정한 정치인이었던 미키와 대재벌의 차녀인 모리 무쓰코 사이엔 하늘과 땅같은 격차가 있었기에 처음에 무쓰코는 결혼을 주저했지만 중매를 선 유우키의 "모리(森)도 미키(三木)도 [[인수분해]]하면 똑같이 3개의 나무니까, 시집이 아니라 그냥 똑같은 집에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일 거다"라는 설득에 결혼을 결심했다. 10살 연하의 아내와는 처음부터 달콤한 신혼생활따윈 없이 정치인과 정치인의 아내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금슬은 꽤 좋았다. 처가인 모리 가문은 재계과 정계 양면의 명문으로, 아내의 아버지인 모리 노부테루, 처남들인 모리 사토루, 기요시, 요시히데가 모두 기업인을 지내다 중의원 의원, 대신직을 역임하였으며, 현재는 [[치바 11구]]의 [[모리 에이스케]] 전 법무대신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. 한편, 아내 무쓰코의 언니는[* 즉 미키의 처형] 경제계에서 이름난 안자이가(安西家)에 시집을 갔는데 이를 통해 미키는 [[사토 에이사쿠]], 그리고 [[미치코 상황후|미치코 황후]]의 친정인 쇼다 가문과도 연결된다. 미키는 재벌과의 혼맥을 대를 이어 맺었는데, 그 자신은 모리재벌 창업주의 사위이며, 장남 미키 히로시는 토요제관 창업자 다카사키 다쓰노스케의 손녀와 결혼시켜 현재 토요제관그룹 홀딩스 명예회장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